끊임없는 한의원 브랜딩의 굴레

한의원 10주년, 리브랜딩 작업 중입니다.

한의원을 2013년에 시작해, 작년에 만 10년을 채우고, 리브랜딩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한의원 로고와 파우치, 각종 제작물을 새로 만들고, 홈페이지를 다시 제작했습니다. 한의원 내부에 탕전실을 만들었고, 새로운 진료 시스템으로 바꾸었고, 마지막으로 실내 인테리어 리뉴얼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써놓으니, 일단 돈이 많이 들 것 같네요. 디자인과 인테리어는 제가 할 수 없으니,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나머지는 가능하면 제 손으로 직접 하고 있습니다. 비용을 절약할 수 있고, 직접 해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특히 홈페이지 제작은 꽤 재밌습니다. 제가 만든 각종 컨텐츠를 홈페이지에 연결하고, 한약 안내와 건강 정보를 웹페이지 형식으로 바꾸니, 스스로 한단계 진보한 느낌이 듭니다.

사실 한의원을 운영하는 10년 내내 ‘브랜딩’ 작업을 했습니다. 요즘 개인 사업을 하려면 ‘브랜딩’이 필수인 것 같습니다. 시중에는 브랜딩에 대한 책이 넘쳐나고, 브랜딩 작업을 해주는 자칭 전문가들이 꽤나 많습니다. 로고를 여러번 바꾸고, 시선을 사로잡는 캐치프레이즈 표현을 만들고, 마케팅과 연결하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만의 차별되는 ‘브랜드’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브랜딩이 도대체 뭘까요?

일단 디자인 작업이 필요합니다.

디자인 작업은 포장입니다. 세상에 물건이 넘쳐나기 때문에, 나의 상품이 예뻐야 잘 보입니다. 그래서 디자인 작업이 필요합니다. 재밌지만 쉽진 않습니다. 괜찮은 색깔 하나 고르기가 참 어렵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파란색이 다 같은 파란색이 아니더라구요. 팬톤에서 매년 올해의 색상을 정해서 발표하고, 이런 트렌드가 한의원 업계로 흘러들어와, 제 지갑까지 털어갈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저는 ‘로얄 블루’를 선택했습니다.

처음 한의원 벽의 한쪽을 온통 파란색으로 칠했죠. 벤자민무어라는 페인트 가게에 가면, 내가 원하는 색상을 콕 찝어 페인트를 조합해줍니다. 재밋는 경험이지만 역시 돈이 듭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브랜딩을 한게 아니라, 다른 브랜드를 잔뜩 소비했습니다. 고급 친환경 페인트로 벽을 칠한다고 해서, 내 브랜드가 고급이 되진 않습니다.

디자인을 혼자 포토샵으로 할 수는 없으니, 전문 디자이너가 필요합니다. 실제로 디자이너 출신인 브랜딩 전문가들이 꽤 있어 보입니다. 한번 미팅을 했던 전문가는 저의 블로그를 보고 글밥 사이에 여백이 많다고 첫인상을 말해줬습니다. 저의 진료 내용이 담긴 글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여백”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니… 디자인이 아닌 “브랜딩” 미팅이었습니다. 아마도 전문가의 관점이 남다르거나, 제가 블로그를 잘못 만들었겠죠.

저의 생각이 담긴 막연한 이미지를, 실제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만드는 작업은, “브랜딩” 과정에서 꽤 중요합니다. 페이스북에서 인스타로 트렌드가 바뀐 것처럼, 글보다 이미지가 눈에 먼저 들어오거든요. 브랜딩 서적을 살펴보면 나이키, 애플, 블루보틀같은 세계적인 기업들의 로고와 디자인 작업들이 예시로 나옵니다. 그래서 내 브랜드도 이렇게 반짝반짝 빛이 나야 눈에 띌 것 같습니다. 저는 블루보틀의 파란색 병 로고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 한의원이 블루보틀은 아닙니다. 언젠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만, 벌써부터 블루보틀일 수는 없습니다. 지금 함께 작업하는 디자이너님은 바로 이 점을 저에게 알려줬습니다. 모두에게 눈에 띌 필요는 없다, 나에게 잘 맞는 색깔을 찾아, 나와 결이 맞는 고객에게 잘 어필해야 한다. 이전에 제가 골랐던 “로얄블루” 파란색은 조금 차분한 파란색으로 바뀌었고, 이 파란색과 잘 어울리는 다섯 색깔을 정해, 로고와 파우치, 제품, 인스타, 유튜브까지, 일관된 디자인 작업이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디자인 작업을 해놓으니, 튼튼한 주춧돌을 만든 느낌입니다. 한의원을 시작하고 10년만에 드디어 디자인에 대한 고민을 덜었습니다.

자, 이제 스토리가 필요합니다.

브랜딩 작업에는 브랜드에 담을 “이야기”가 꼭 필요합니다. 퓨어 이과생에게 스토리라니, 브랜딩 작업은 참 난해합니다. 더구나 10년전 막 한의사가 된, 대체로 살아온 일생 내내 공부만 했던 저에게, 무슨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었을까요? 물론 의지는 강했습니다. 열심히 진료를 잘 해서, 더 나은 의료 환경을 만들겠다는 젊은 패기가 있었죠. 그 때 썼던 블로그 포스팅을 보면, 정말 온 몸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난 10년, 패기는 상처받고, 욕심은 진정됩니다. 이렇게 저만의 “스토리”가 만들어졌습니다.

나이키의 “Just do it”같은 캐치 프레이즈가 꼭 필요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저같은 일개 한의사가, 겨우 단어 몇 개를 조합해 세상을 사로잡을 수 있겠어요? 여전히 헤매는 중이지만, 꼭 짧은 문장 하나에 꾹꾹 눌러담기보다, 편한 글로 슥슥 남겨도 괜찮지 않나 싶습니다. 나와 잘 맞는 고객에게, 내 생각이 잘 전달되기를 바라면서요.

그러려면 포장 속에 알맹이가 제대로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게 스토리인 것 같습니다. 이 알맹이를 “브랜딩” 전문가가 만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10년 동안 제가 브랜딩의 굴레에 빠졌던 이유는, 저에게 “알맹이”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브랜딩으로 보여줄게 없는데, 어떻게 보여줄지를 고민했었죠. 지금 더 나아졌는진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10년 동안 한의원 문을 닫진 않아서, 약간의 자신감이 생겼고, 동시에 겸손해지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막연히 상상했던 포장과 알맹이는 생각보다 작아졌거든요. 그래도 10년의 세월동안 저만의 알맹이가 조금은 단단해진 것 같습니다.

브랜드가 남과 다른 나의 특징이라면?

이렇게 접근하면 한의사 업계에 브랜딩을 적용하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한의대를 입학해서 전문의가 되는 10년의 과정동안, 남들과 다른 독창성보다, 누구나 똑같은 표준화된 진료를 배우거든요. 한의대에서 “비방”을 가르쳐주진 않습니다. 그럼 애초에 비방, 비밀스러운 처방이 아니겠죠. 똑같은 교육을 받으면서, 어떻게 남들과 달라질 수 있을까요?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 독창성과 브랜드가 필요합니다. 비단 한의사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한의사는 잘 치료해야 합니다. 사실 이게 중요합니다. 한의사에게 필요한건 멋진 디자인이 아니라, 아픈 사람을 잘 고치는 실력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네이버에 한의원을 검색하면, 저마다 잘 치료한다는 자랑이 넘쳐납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나를 돋보이게 하려면 브랜딩이 필요합니다. 학교에서는 배우지 않는 내용이죠. 10년을 고민하고 부대끼며, 겨우 “모던한의사”라는 저만의 브랜드를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브랜딩은 기승전결에서 “기”에 해당합니다. 브랜드라는 주춧돌을 만드는데 10년이 걸리다니 너무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난 10년이 결코 쉽진 않았거든요. 그래도 앞으로 “승전결”의 30년이 남았다면 꽤나 기대가 됩니다. 남들과 다르면서, 잘 치료하는 한의사가 되기 위해, 더 나은 성장이 있길 바랍니다.